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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Activity_차 茶] 차 茶 이야기 Hit 332
  • 작성자 심은지
  • 등록일 2018-10-04 13:50:08

안녕하세요. RC 섬김팀의 멘티인 재료화학공학과 17학번 심은지입니다.

저희 섬김팀은 RA활동으로 ‘RC 홈페이지 활성화를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번 학기 RC 개인 Activity 활동으로 에 대해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차에 대해 기본적인 내용을 알고 맛보고 시향 하는 활동을 진행하겠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차에 대한 기본 지식을 쌓기위해 차의 정의와 역사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정의

차나무의 어린 잎을 따서 만든 음료.

 

개설

우리 나라에서는 곡류로 만든 율무차·옥수수차, 여러 식물의 잎으로 만든 두충차·감잎차 등, 과실류로 만든 유자차·모과차, 꽃이나 뿌리·껍질 등으로 만든 국화차·인삼차·귤피차, 약재로 만든 쌍화차 등과 같이 기호음료 전체를 칭하기도 한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의 차란 차나무의 잎을 의미하는 것이고, 일반적으로 말하는 율무차·인삼차 등은 탕()에 속하는 것이다.

 

차는 처음에는 음료수의 일종이거나 약용으로 쓰였지만 차차 기호식품화되면서 취미생활과 연결되고, 다시 일상생활의 도()를 끽다(喫茶)와 관련지어 다도(茶道)로까지 발전시켰다. 차에는 작설차·납전차·납후차·우전차·전차·말차(抹茶) 등 다양한 종류가 있는 것 같으나, 이것은 차잎의 채취 시기 또는 가공방법에 따라 나눈 것이다. 일반적으로는 불발효차인 녹차, 반발효차인 우롱차, 발효차인 홍차로 구분된다.

 

녹차는 차잎을 증기 또는 화열로써 차잎 중에 존재하는 효소인 폴리페놀옥시다아제(poly phenol oxydase)의 활성을 잃게 하여 산화를 막고 고유의 녹색을 유지시킨 것이다. 따라서 녹차는 증기를 사용하는 증제차와 볶아서 만든 볶음차로 나눈다. 우리 나라는 이들 두 종류를 다 제조하고 있으나 일본에서는 거의가 증제차이며, 볶음차는 구주지방(九州地方)의 일부에서만 제조하고 있는 실정이다.

 

반면에 중국의 녹차는 거의가 볶음차이며, 우롱차는 반발효의 차로 생잎을 일광에 4050분간 쪼여서 때때로 교반(攪拌휘저어 함께 섞는 일)하여 균일하게 만든 다음, 실내로 옮겨서 1시간마다 1015분 정도 교반하여 잎 주변이 갈색이 되고 약간 발효가 되어 방향을 발휘하는 시점에서 볶아 만든다.

 

우롱차에 속하는 차 중에 포종차라고 불리는 착향차가 있는데, 이것은 우롱차보다는 햇볕에 건조시키는 것이나 방향의 발생, 실내로 옮겨서 놓아 두는 과정 등을 모두 약간씩 줄여 차잎의 갈색이 약간 일어난 시점에서 볶아 만든 차이다. 홍차는 차잎을 말려서 잘 편 다음, 잎녹의 산화효소에 의해 차 성분의 산화를 진행시켜 제조한 흑색의 차이다.

 

역사

차는 7세기 전반인 신라 선덕여왕 때부터 있었다. 그것이 성행한 것은 828(흥덕왕 3) 대렴(大廉)이 당나라에서 차 종자를 가져다 왕명으로 지리산에 심은 이후의 일이다.

 

이때부터 지리산을 중심으로 하는 영남과 호남 지방이 우리 나라 차의 본고장이 되었다. 이 지방의 기후 및 입지조건이 차나무 재배에 적합한 때문이기도 하였다. 한편 가야시대에 인도에서 차가 전래되었다는 설도 있지만, 이를 뒷받침할 만한 사료는 불충분하다.

 

통일신라시대에는 일부 승려 및 화랑도들이 차를 마셨다. 사복(蛇福)이 원효(元曉)에게 차를 공양했다는 설화, 8세기의 보천(寶川효명(孝明) 두 왕자가 오대산에서 수도할 때 문수보살에게 차를 공양했다는 기록, 경덕왕 때의 승려 충담(忠談)이 매년 33일과 99일에 삼화령(三花嶺)의 미륵불에게 차를 공양했다는 기록, 경덕왕이 승려 월명(月明)에게 차를 예물로 주었다는 기록, 진감국사(眞鑑國師무염국사(無染國師) 등이 차를 마셨다는 기록 등은 이 시대 승려사회에 음다(飮茶)의 풍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해 준다.

 

또한 화랑이었던 사선(四仙永郎·述郎·安詳·南石)들이 경포대·한송정 등지에서 차를 마실 때 사용한 석조·석정(石井석지(石池) 등의 유물이 조선 초기까지 전해지고 있었다. 석정은 현존하고 있다.

 

이 시대의 승려나 화랑도 사이에 음다의 풍이 있었던 것은 이들이 이 시대의 선량(選良)이었고, 정신을 맑게 해 주는 차의 효능은 이들의 수행에도 밀접한 연관이 있었기 때문이다.

 

고려시대에는 음다의 풍이 보다 넓게 퍼져 있었다. 왕실·귀족·사원 등에 차가 유행했기 때문이다. 차는 주과(酒果)와 더불어 고려 궁중의 주요한 음식물 가운데 하나였다. 궁중에서는 연등회·팔관회 등의 국가적인 대제전이나 왕자·왕비 등의 책봉의식에 진다의식(進茶儀式)이 행해졌다.

 

또 차가 국제외교상 중요한 예물 중의 하나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송나라의 예물 중에는 용봉차(龍鳳茶)가 끼어 있었고, 고려에서는 거란에 뇌원차(腦原茶)를 보내기도 하였다. 국왕은 신하나 승려, 혹은 노인에게 차를 하사하기도 하였다. 궁중의 차에 관한 일은 다방(茶房)이라는 관부에서 맡아보았다. 귀족들 또한 차를 즐겼다. 귀족들은 송나라 상인으로부터 중국 차를 구입하거나, 좋은 다구(茶具)와 정원을 꾸미기도 하였다.

 

그리고 당시의 귀족계층에 속하는 승려들도 차를 즐겨 사원에 차를 진공(進供)하는 다촌(茶村)까지 생겨났다. 선가(禪家)의 다도(茶道)는 취미생활에 그치지 않고 수행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이 시대 문인들은 차를 주제로 한 시를 많이 남겼고, 차나 다구를 선물하는 풍속이 있었다. 사원에서는 차 끓이기를 서로 겨루는 명선(茗禪)이라는 풍속이 행해지기도 하였다.

 

또한 이 시대 음다풍의 성행은 고려청자의 발달에 영향을 끼치기도 하였다. 고려시대에는 의천(義天천책(天頙충지(冲止) 등의 고승과 이인로(李仁老임춘(林椿이규보(李圭報홍간(洪侃한수(韓脩홍약(洪瀹이연종(李衍宗이색(李穡이제현(李齊賢이숭인(李崇仁정몽주(鄭夢周원천석(元天錫) 등의 지식인이 차를 즐겼다. 이들은 차시(茶詩)를 남겼다.

 

불교와 인연이 깊었던 음다의 유풍(遺風)은 조선시대에 이르러 불교와 더불어 쇠퇴하였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이 시대에는 차가 고려 때만큼 유행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이 시대에도 왕실에서는 차례(茶禮)가 행해졌고, 사원을 중심으로 다도의 전통이 이어졌다.

 

조선 초기에는 이행(李行서거정(徐居正김시습(金時習김종직(金宗直) 등에 의해 고려의 음다 유풍이 계승되었다. 궁중에서도 외국 사신을 맞이할 때 차례가 행해졌다.

 

그리고 중기까지도 차를 아는 문인들이 가끔 있었지만 임진왜란을 전후한 16세기경에는 음다의 풍이 쇠퇴하고 차에 대한 이해가 적어져 궁중에서까지도 차를 제대로 마시지 않은 것 같다. 명나라의 장수 양호(楊鎬)가 선조에게 귀국에서는 왜 차를 마시지 아니합니까라고 물었을 때, “우리 나라 습속에는 본래 차를 마시지 않는다.”고 대답할 정도였다.

 

조선 초기는 물론 중기 이후에도 승려들 중에는 차를 마시는 예가 있었고, 남쪽지방의 사원에서는 적은 양이지만 차가 법제(法製)되면서 그 명맥이 이어졌다. 이 시대 선가의 다도는 조주다풍(趙州茶風)을 계승한 것이었다.

 

이처럼 사원을 중심으로 그 명맥이 이어지고 있던 음다풍은 19세기에 이르러 다시 한번 성행하게 되었다. 대흥사의 혜장(惠藏초의(草衣범해(梵海) 등의 다승(茶僧)과 정약용(丁若鏞신위(申偉김정희(金正喜홍현주(洪顯周이상적(李尙迪) 등 차를 즐기는 문인들이 있었다.

 

초의는 동다송 東茶頌을 짓고 차를 재배하는 등 다도의 이론이나 실질적인 면에서 정리함으로써 우리 나라의 다도를 크게 일으켰다. 다도라는 용어가 구체적으로 나타난 것도 이 무렵이었다.

 

정약용은 강진(康津)에서 18년 동안의 유배생활을 하는 중에 차를 즐겨 걸명소 乞茗疏등의 시를 남겼고, 강진을 떠나면서는 그의 제자들과 함께 다신계(茶信契)를 조직하기도 하였다.

 

또 화엄사(華嚴寺쌍계사(雙磎寺대흥사(大興寺) 등의 사원에서는 차가 생산되었는데, 그 양은 적었다. 고려시대 이후로 차를 생산하기 위한 적극적인 노력이 거의 없었고, 토공(土貢)을 강요한 관인들의 주구(誅求)는 오히려 차의 생산을 저해하는 결과를 빚기도 하였다.

 

19세기 말에는 외국인들이 우리 나라 다업진흥(茶業進興)을 건의하곤 하였다. 1883(고종 20)부터 농상사(農商司)에서는 차의 재배를 관장하고, 차 재배를 위한 조사를 지시했으며, 1885년에는 청나라에서 차나무 모종 6,000주를 수입하기도 하였다. 이 무렵인 1885년에 안종수(安宗洙)가 쓴 농정신편 農政新篇에서는 차의 재배에 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한말에는 고관들 사이에 다화회(茶話會)라는 모임이 자주 열렸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인들에 의해 차의 생산과 보급, 그리고 한국 차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었다. 물론 그 목적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위한 한 방편이었다. 광주에 무등다원(無等茶園), 정읍에 소천다원(小川茶園), 보성에 보성다원(寶城茶園) 등이 조성된 것도 일본인들에 의해서였다.

 

1930년대부터 고등여학교와 여자전문학교에서 다도가 교육되었는데, 1940년대에는 47개 여자고등학교와 상당수의 여자전문학교에서 교습되고 있었다. 일제강점기의 다도교육은 일본의 다도를 우리 나라에 옮기려는 식민지교육의 일환으로 이루어졌다.

 

1960년대 이후 새로이 일기 시작했던 차에 대한 관심이 1970년대 후반부터 활기를 띠면서 발전하고 있다. 허백련(許百鍊)과 최범술(崔凡述)은 최근 우리 나라의 다도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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